○ 장서(藏書)가 많음을 이르는 말 ○ 汗(땀 한) 牛(소 우) 充(채울 충) 棟(마룻대 동)
수레에 실어 운반(運搬)하면 소가 땀을 흘리게 되고, 쌓아올리면 들보에 닿을 정도(程度)의 양이라는 뜻으로,장서(藏書)가 많음을 이르는 말
당(唐)나라의 명문가로 알려진 유종원(柳宗元)이 같은 시대(時代)의 역사학자 육문통을 위해 쓴 묘표(墓表)에 있는 말이다. 묘표란 죽은 사람의 사적과 덕행(德行)을 기리는 문장으로 돌에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다.
「공자(孔子)<춘추(春秋)>의 해석을 둘러싸고 1000명의 학자(學者)가 온갖 주석을 하고 있지만, 비뚤어진 해석이나 다른 학파에 대한 비난(非難), 공격(功擊)만이 눈에 띈다. 더욱이 그런 패거리들의 저작만이 세상(世上)에 횡행하고.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그 저서(著書)나 장서의 엄청남이란, 소장하면 건물을 꽉 메우고, 꺼내어 운반하게 되면 수레를 끄는 마소도 그 무게에 땀을 흘릴 정도다.)라는 상태다.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
위진(魏晉)시대,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瑞康)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령(劉伶) 상수(尙秀) 곧 죽림 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장(老莊)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청담(淸談)을 즐겨 담론했다.
그런데 죽림 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당했다.
그 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 되는 아들 혜소( 紹:?∼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에게 천거했다."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 缺)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비書郞)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궐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와융에게 말했다."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鷄群一鶴]'같았습니다."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 有(있을 유) 備(갖출 비) 無(없을 무) 患(근심 환)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뜻으로 ①미리 준비(準備)가 되어 있으면 우환(憂患)을 당(當)하지 아니함 ②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
說命(열명)은 殷(은)나라 高宗(고종)이 傅說(부열)이란 어진 재상(宰相)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政事)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行動)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能(능)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功(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어느 해 鄭(정)나라가 송(宋)나라를 침략하자 송(宋)나라는 위급함을 진(晉)나라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진의 국왕인 悼公(도공)은 즉각 魯(노) 齊(제) 曹(조) 등 10여개국에 이 사실을 통고하고 연합군을 편성했다. 진의 위강이 통솔한 연합군은 정의 도성을 에워싸고 송에서 철수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나라는 재빨리 송 진 제 등 열두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북쪽 나라들의 이런 결속에 위협을 느낀 남쪽의 楚(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했다. 열세를 깨달은 정나라는 초나라와도 盟約(맹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이번에는 연합국측이 불만을 품고 정나라를 쳤다. 또다시 정나라가 화친을 요구하자 진(秦)나라는 마지 못해 이에 응함으로써 싸움은 끝났다.도공은 감사의 표시로 정나라에서 보내온 보물과 미녀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싸움에 지쳐있을 그를 달래주려고 마음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대쪽같은 위강이 그런 선물을 받을 턱이 없었다. 선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도 위태(危殆)로운 때를 생각해야 하고 위태(危殆)로운 때를 생각한다면 언제나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이 말을 전해 들은 도공은 새삼 위강의 남다른 식견에 머리를 끄덕이며 미녀들을 모두 정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 은혜가 뼈에 새길 만큼 커서 잊히지 않는다 ○ 刻(새길 각) 骨(뼈 골) 難(어려울 난) 忘(잊을 망)
입은 은혜(恩惠)에 대(對)한 고마운 마음이 뼈에까지 사무쳐 잊혀지지 아니함.다른 사람에게 입은 은덕(恩德)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속 깊숙이 사무치어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풀을 묶어서, 즉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결초보은(結草報恩)이나 죽어서 백골이 되어도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뜻의 백골난망(白骨難忘)과 비슷한 말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유래는 다음가 같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는 병이 들어, 그의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후처(後妻)였던 위과의 서모(庶母)를 개가(改嫁)시키라고 하였다가 다시 번복하고는 서모가 순사(殉死: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하게 하여 자기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위과는 서모를 순사하도록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서모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하였다. 그뒤 진나라의 위과가 전쟁터에서 진(秦)의 환공(桓公)이 보낸 장수인 두회(杜回)와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두회가 탄 말이 넘어져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위과의 꿈속에 서모의 아버지가 나타나 딸을 지켜준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풀을 엮어서 두회가 탄 말이 걸려 넘어지게 했다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는 좌씨전(左氏傳)에서 유래하였다.
뼈에 새길(刻骨) 정도로 잊을 수 없다(難忘)는 말은 원한을 잊을 수 없다는 뜻도 되겠지만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강조할 때 더 많이 쓴다. 증오나 한을 잊지 못할 때는 骨髓(골수)에 사무치다, ‘뼛골에 사무치다’로 약간 달리 표현한다. 남에게 큰 은혜를 입고도 갚을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지 ‘머리 검은 짐승은 남의 공을 모른다’는 속담이 전한다. 또 ‘큰 은혜는 갚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작은 원한은 반드시 갚으려 한다‘고 菜根譚(채근담)에도 타이른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고사를 인용하면서 곧잘 깨우치는 성어가 많다.
원래 하늘과 땅을 걸고, 즉 운을 하늘에 맡기고 한번 던져 본다는 뜻인데, 중국 당(唐)나라 제일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용피호곤할천원 억만창생성명존 수권군왕회마수 진성일척도건곤(龍疲虎困割川原 億萬蒼生性命存 誰勸君王回馬首 眞成一擲賭乾坤:용은 지치고 범도 피곤하여 강과 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로 인해 억만창생의 목숨이 살아 남게 되었네. 누가 임금에게 권하여 말머리를 돌리게 하고, 참으로 한 번 던져 하늘과 땅을 걸게 만들었던고)”
이 글은 한유가 옛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싸우던 홍구(鴻溝)라는 곳을 지나다 초(楚) ·한(漢)의 옛 일이 생각나서 지은 글이다.
‘아는 것이 병‘이란 속담대로 지식이 해가 될까? 이것은 정확하지 못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지식은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몰라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격언을 남겼다. 모르는 편이 나을 때가 간혹 있겠지만 도리를 알고 있는 까닭으로 도리어 불리하게 되었을 때 한탄하는 것이 識字憂患이다.
이 성어는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北宋(북송)의 대표적 시인 東坡(동파) 蘇軾(소식)이 ‘石蒼舒醉墨堂(석창서취묵당)’이란 시의 첫 구절에 바로 시작한다. ‘인생은 글자를 알면서 우환이 시작되니, 성명이나 대강 적을 수 있으면 그만둠이 좋도다(人生識字憂患始 姓名麤記可以休/ 인생식자우환시 성명추기가이휴).’ 麤는 거칠 추.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 설명하는 내용은 이렇다. 劉備(유비)가 諸葛亮(제갈량)을 三顧草廬(삼고초려)로 맞이하기 전에 있었던 軍師(군사)가 徐庶(서서)였다. 그는 曹操(조조)가 탐을 내는 인물이었는데 휘하에 끌어들이려고 계략을 썼다.
그가 효자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 衛(위)부인이 위독하다는 가짜편지를 보냈다. 영문을 모른 위부인은 아들이 돌아오자 자기 필체를 위조한 계락인 것을 알고 통탄했다. 나중에 서서가 조조 진영으로 간 것을 알고 효심과 거짓편지 때문이라며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이 걱정을 낳게 하는 근본 원인(女子識字愚患/ 여자식자우환)’이라 했다. 위부인의 말을 인용해 후세 사람들은 여자가 글을 배우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지만 실제는 원본에 없는 내용이 번역소설에 재미로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보다 울분에 차지만 더 멋진 사용처가 있다. 조선 말기 우국지사 梅泉(매천) 黃玹(황현) 선생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絶命詩(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3수에 나오는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란 절절한 구절을 남겼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머리를 바짝 치켜들고 무서움이 없이 나아가는 기세가 意氣揚揚(의기양양)이다. 높은 벼슬하는 주인을 태운 마차의 마부가 길을 비키는 사람들을 보고선 자신이 잘 나서 그러는 줄 알고 우쭐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晏子之御(안자지어)에 나온 그 마부다. 알량한 배경이라도 있으면 거들먹거리는 세상에서 이와는 달리 머리를 푹 수그리고(垂頭) 기운을 잃었다면(喪氣) 보기에 딱하다. 어떤 일을 해도 잘 풀리지 않거나 잘 나가다 기세가 꺾여 의기소침한 모습을 가리킨다. 垂首喪氣(수수상기), 低頭喪氣(저두상기)라고 써도 같은 뜻을 나타낸다.
唐(당)나라 말기 安史(안사)의 난(755~763)과 黃巢(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난 후 조정은 쇠약해져 군웅할거의 시대가 됐다. 後梁(후량)의 태조가 되는 朱全忠(주전충)과 陝西(섬서, 陝은 땅이름 섬) 일대서 세력을 떨치는 李茂貞(이무정)이 전국을 양분했고, 조정의 신하들도 두 패로 갈려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주전충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로 진격하자 환관 韓全誨(한전회) 일파는 왕을 협박하여 결탁한 이무정의 본거지로 함께 달아났다. 이곳을 포위한 주전충에 성문을 닫아걸고 맞섰지만 군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자 이무정은 화의를 청했다. 이것을 본 한전회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는 계책도 소용이 없어 고개를 떨구며 기운을 잃고(自見勢去 計無所用 垂頭喪氣/ 자견세거 계무소용 수두상기)’ 말았다. ‘新唐書(신당서)’ 한전회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에 꼽히는 韓愈(한유, 愈는 나을 유)의 ‘送窮文(송궁문)’에서도 사용됐다. 정월 그믐날에 가난을 가져오는 귀신인 窮鬼(궁귀)를 물리치는 풍습을 의인화한 글이다. 5가지 궁귀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달라는 주인에게 바보스런 짓이라며 되레 큰소리친다. 사람은 오래 살지 않지만 가난과 함께 이룬 명성은 백세 뒤에도 마멸되지 않는데 어찌 쫓아내려 하느냐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머리를 떨어뜨리고 기가 죽어 두 손 들고 사과했다(垂頭喪氣 上手稱謝/ 수두상기 상수칭사)’.
기세를 올리던 사람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고개를 꺾은 모습은 보기에 딱하다. 졸업과 취업을 앞둔 많은 젊은이의 의기소침은 나라의 활력을 잃게 만든다. 금수저와 낙하산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리와 갑질 행태는 지도층에 더욱 신뢰를 잃게 만든다. 경제 침체와 함께 모든 것이 꽉 막힌 정국을 시원하게 뚫어줄 묘안은 없는지 모두들 답답하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바람 부는 대로 맡겨 머리칼을 정돈하고(櫛風) 흐르는 빗물로 목욕을 대신한다(沐雨). 생활이 어려워 고생하는 노숙인의 생활이 연상된다. 하지만 이 성어는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오랜 기간 객지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한다는 뜻을 가졌다. 큰 뜻을 이루려면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생을 이겨내며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함은 물론이다. 같은 의미로 바람을 맞으면서 밥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잔다는 風餐露宿(풍찬노숙)이란 말도 있다. 櫛雨(즐우)나 櫛風(즐풍)으로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나라의 큰일을 맡고서도 오랜 기간 떠돌아다니며 노숙생활을 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禹王(우왕)이라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중국 전설상의 夏(하)나라 시조인 우왕은 수년간 대홍수가 연이어 일어날 때 치수사업에 골몰하여 물길을 잡았다. 자신의 빗질이나 목욕은커녕 13년 동안 부인이 홀로 지키는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집을 지나쳤다는 過門不入(과문불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莊子(장자)’ 雜篇(잡편)의 마지막 부분인 天下(천하)편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간략한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兼愛說(겸애설)을 주창했던 墨子(묵자)를 설명하면서 나오는 우왕의 이야기를 보자. 옛날에 우임금이 홍수를 막을 때 직접 삼태기와 쟁기를 들고 큰 강 300개와 지천 6000개, 그리고 무수히 많은 작은 강의 물길을 터서 아래로 흘러가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우왕의 ‘장딴지에는 솜털도 나지 않았고, 정강이에는 굵은 털이 닳아 없어졌으며, 폭우로 목욕하고 질풍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모든 나라를 편안하게 했다(腓無胈 脛無毛 沐甚雨 櫛疾風 置萬國/ 비무발 경무모 목심우 즐질풍 치만국)’고 했다. 腓는 장딴지 비, 胈은 정강이털 발, 脛은 정강이 경. 묵자는 그렇게 고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우왕의 방식이 아니니 묵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다.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움츠렸던 공직자들도 의욕적으로 새 정부에서 열심히 역량을 펼친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일할 사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혼신을 다한다는 정신으로 업무에 충실하다면 난국도 쉽게 넘으리라 본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어려운 글자로 된 이 성어는 진달래와 철쭉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봄을 대표하여 곳곳에 축제도 벌이는 이들 꽃은 자주 일컫는 말로는 서로가 딴판이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참꽃이라 하지만,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고 염소나 양도 피한다고 한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란 구절의 시 ‘진달래꽃’은 金素月(김소월)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李元壽(이원수)의 ‘고향의 봄’에도 등장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趙演鉉(조연현)은 이렇게 노래했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진달래꽃을 杜鵑花(두견화)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애달픈 이야기가 따른다. 秦(진)나라에 멸망한 고대 蜀(촉)나라의 望帝(망제)의 혼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前漢(전한)말기의 揚雄(양웅)이 지은 ‘蜀王本紀(촉왕본기)’와 東晋(동진)의 常璩(상거, 璩는 옥고리 거)라는 사람이 지은 ‘華陽國志(화양국지)’에 나온다고 한다. 망제는 나라를 빼앗긴 뒤 밤마다 ‘不如歸(불여귀, 돌아가고 싶다)’라고 피가 나도록 울다 죽어 두견새가 되었다. 접동새, 子規(자규)로 불리는 두견새는 그래서 歸蜀道(귀촉도), 蜀魄(촉백), 망제의 이름을 따 杜宇(두우), 杜魄(두백)이라 하기도 한다. 망제의 피가 떨어진 곳에 피어난 꽃이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술이 杜鵑酒(두견주)이고 진달래 꽃잎을 따 찹쌀가루를 섞어 지진 花煎(화전)은 예전 행락객의 최고의 운치였다.
5월에 잎과 함께 가지 끝에 연한 분홍색의 꽃이 피는 철쭉꽃은 먹지는 못해도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 앞에서 머뭇머뭇하게 한다고 해서 躑躅花(척촉화)가 됐다고 한다. 실제 뜻으로 결단을 못하고 우물쭈물한다는 뜻으로 많이 고전에서 사용됐다. 조선 명종 때의 문신 裵龍吉(배용길, 1556~1609)의 철쭉을 읊은 시가 있다. ‘철쭉이 못 가에서 자태를 뽐내나, 외로운 꽃떨기 힘없이 모두 기울었네(躑躅臨池欲自誇 孤䕺無力摠低斜/ 척촉림지욕자과 고총무력총저사), 봄날이 지나가니 꽃도 따라 시드는데, 이제야 술잔 잡고 꽃구경을 하려네(春光已老花隨老 始酌叵羅欲賞花/ 춘광이로화수로 시작파라욕상화).’ 䕺은 떨기 총, 叵는 어려울 파. ‘琴易堂集(금역당집)‘에 실려 있다.
봄에 흔한 꽃에 이처럼 여러 의미가 있는 것은 의외다. 아름다움에 취해, 흥에 겨워 꽃을 지나치기 전에 간단한 뜻을 새기면 더 의의가 있겠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교활한 이미지로 먼저 다가오는 여우는 백발이 될지 모르나 결코 선량해지지 않는다고 낙인이 찍혔다. 九尾狐(구미호)는 간사하고 요망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 토끼는 정답고 친한 동물로 여겨진다. 게으름을 부려 거북에게 경주를 지지만, 자라를 속여 목숨을 건지는(鼈主簿傳/ 별주부전, 鼈은 자라 별) 지혜가 있어 사랑스러운 분신의 대명사다.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좋을까. 달리기에서 월등하게 앞서는 토끼와 쫓아봐야 헛일인 것을 아는 여우는 그저 그런 사이다. 여우가 죽었을 때(狐死) 토끼가 슬피 운다(兎悲)는 이 성어는 같은 처지의 동류끼리 불행을 위로한다는 뜻도 있고,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픈 척 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중국 元(원)나라 때 완성된 ‘宋史(송사)’의 李全(이전)전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송나라 말기, 1127년 女眞(여진)이 세운 金(금)나라가 쳐들어와 왕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강남으로 쫓겨 가 南宋(남송)이 건립되었다. 졸지에 나라를 빼앗긴 강북 지역의 한인들은 곳곳에 자위를 위한 집단을 이루었고, 옛 땅을 찾기 위한 의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楊妙眞(양묘진)이란 여걸이 오라버니 楊安兒(양안아)가 의병을 이끌다 전투 중 죽음을 당해 무리를 이끌게 됐고 이전이란 사람도 합류했다.
이전과 양묘진은 부부가 되어 남송과 금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했다. 楚州(초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남송에선 夏全(하전)이 이끄는 군대가 쳐들어왔다. 하전이 남송에 귀순한 의병 출신인 것을 알고 양묘진이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다.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서 우는 법인데 이 쪽이 죽으면 그쪽도 어찌 홀로 살 수 있겠습니까(狐死兎泣 李氏滅 夏氏寧獨存/ 호사토읍 이씨멸 하씨녕독존)?’ 이 쪽은 물론 이전, 상대는 하전이다. 이 말을 들은 하전은 옳다고 여겨 공격을 멈췄으나 배반을 당해 나중 금나라에 투항했다. 여우 죽음을 슬퍼해 주려다 속아 넘어간 것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