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이 27일(현지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정식 등재됐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며 환호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가 있어 등재 과정이 마무리됐다고 평한 반면, 일부 보수 매체는 '핵심 조건'인 '조선인 노동자' 전시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 이후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등재까지 14년 넘게 걸렸다"며 기쁨을 나타냈다. 그는 "전통 수공업 수준을 높여 구미의 기계화에 견줄 만한 일본 독자 기술의 정수였던 사도광산"이라며 등재를 결정한 위원회에 참석한 니가타현 지사와 사도 시장에게 전화로 축하의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지역과 국민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은 담화문을 통해 "세계유산 등재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오랜 세월에 거친 지역 주민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도광산이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전통 수공업을 통한 금 생산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임을 언급하며 많은 방문객을 유치할 뜻을 내비쳤다. 또한 그는 문화유산 등재가 한국을 포함한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 모두의 합의를 통해 등재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들은 사도광산 관련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에 대한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가노 다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만 27일 등재를 결정한 회의에서 한국의 강제 노역 노동자에 대해 "진심으로 추모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본 언론은 사도광산 등재를 두고 한·일이 합의한 것에 대해 다양한 논평을 내놨다. 진보 성향 아사히신문은 27일 등재의 최대 쟁점이 조선인 강제노역 문제였다며 "최근 전례 없는 (한일 간) 양호한 관계도 합의를 뒷받침했다"고 평했다. 해당 신문은 일본 정부가 광산 인근 박물관에 광산 노동자 관련 전시실을 마련하는 등 노력을 보여 한국 정부로부터 신뢰를 얻어냈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은 사도광산 등재 여부가 한일 간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며 "지난해 양국 정상 간 셔틀 외교 재개 등 한일 관계가 개선된 가운데 실무자 간 대응을 통해 한국 측의 협조를 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사설을 통해 한일 간 합의로 사도광산이 등재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양국 간 지속적 소통을 주문했다.
일본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강제노역 조선인 전시실이 아예 불필요했다는 회의적 주장을 내놨다. 이 신문은 28일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 전시는 불필요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등재 과정에 한일 양국간 합의 내용이 불합리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사도광산 전시에 한국의 관여를 허용하겠다는 말이냐"며 "그렇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해당 매체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시기가 일제강점기가 포함되지 않은 16~19세기 중반인 만큼 한국과 협의가 필요 없었다고 피력했다.
앞서,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46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 세계유산 등재를 컨센서스(전원동의) 방식으로 결정했다. 일본은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노역 시기를 포함한 근대 시기의 기록을 빼놓아 전체 역사를 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일본은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권고를 수용해 전체 역사를 전시에 반영하기로 했다. 사도광산 인근 박물관 한 구획에 강제노역 노동자 관련 사료를 전시하는 공간을 두는 것이 조건이다.
연혁
1601년 - 쓰루코 긴자의 산사(山師) 3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1603년 - 사도부교 오쿠보 나가야스가 관할을 맡았다.
1868년 - 공부성의 소유가 되었다.
1889년 - 궁내성 어료국의 소유가 되었다.
1896년 -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인수하였다.
1918년 -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지금의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1967년 - 사도 금광 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광산 유적'으로써 일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9년 3월 31일 - 광산이 고갈됨에 따라 채굴이 중단되었다. 미쓰비시 마테리얼의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2007년 - 일본의 지질 100선에 선정되었다.
사도가섬
일본 니가타현 북서쪽에 있는 섬. 섬 전체가 니가타현 사도시에 속하며 면적은 855km²로 한국의 섬들과 비교하면 가장 큰 제주도(1,850km²)의 절반 정도 수준이며, 두 번째로 큰 거제도(379.5km²)보다는 두 배 이상 크다. 일본에서는 본토 4개 섬을 포함해 6번째로 큰 섬이며 본토에 속한 섬 중에서는 가장 크다. 사도 섬은 동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일본에서 이 섬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도가시마(さどがしま)와 사도시마(さどしま) 두 가지가 있다. 본토 일본인들 중에도 '사도시마'로 읽는 사람이 많지만 현지인들은 사도가시마(佐渡ヶ島)라고 부른다. 이 섬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이름은 '사도가'가 아니라 '사도'이다.
한국에는 '사도 섬'이라는 명칭으로 많이 알려졌다. 일본 정부 관광국에서는#에 따르면 '사도가시마 섬'과 '사도 섬'을 혼용하고 주 니가타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는 '사도 섬'을 사용한다.
현재 인구는 5만 2천명 수준인데 인구가 3만 명인 쓰시마 섬처럼 점점 감소하고 있다. 이키 섬도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4만 명이 넘었으나 현재는 2만 4천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원래는 사도라는 다른 쿠니(国)였으나 근대 들어서 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유배지로도 악명이 높았던 섬이다. 에도 시대에는 사도봉행이 놓였다. 유배객으로서 많은 귀족들이 사도로 들어왔고 니시미카와 사금산이 있어 예부터 금의 섬으로 알려졌다.
사도국이 성립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701년에 이곳에 사와다군(雑太郡)을 두었고 721년에 사와다군, 카모군, 시모치군의 3군으로 나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슈고다이로서 혼마씨를 사도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사도에 들어온 고케닌 시부야, 아이하라 씨 등과 함께 센고쿠 시대까지 이들이 사도를 지배했다.
에치고국의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의 뒤를 이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평정해 혼마씨는 멸망하였고 에도 막부가 사도 봉행소를 두어 사도국을 지배하였다. 사도금광에서 산출된 금은 막부의 재정을 넉넉하게 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사도 봉행소를 폐지하고 사도현이 되었다. 1871년 1차 부현 통합으로 아이카와현이 되었고 1876년의 2차 부현 통합으로 니가타현에 흡수되었다. 1896년에는 사도 3군(사와다군, 카모군, 시모치군)이 사도군으로 통합되었다.
섬 동쪽에 사도 공항이 있는데 한때 니가타 공항을 연결하는 노선만 한정하여 운항하게 된 적이 있었으나 누적된 적자로 인하여 2014년 이후로 사실상 운항이 중단되었다. 도로 교통은 섬내에서는 350번 국도, 45번 니가타현도가 부설되었다. 사도가 섬과 일본 본토를 오가는 이동수단은 어쩔 수 없이 여객선 혹은 페리를 타고 가야 하는 불편이 있다.
페리는 제3섹터 회사인 사도 기선에 의해 운항되고 있다. 사도 기선은 일본 최초의 제3섹터 회사로 니가타현이 지분의 35.51%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섬 동부의 료츠에서 니가타시로 가는 노선과 섬 서부의 오기[6]에 서 조에츠시 나오에츠항으로 가는 노선이 운항 중이다. 교통카드 사용도 가능하다.
섬내에는 버스 교통이 있다.
사도 광산
사도 금광(일본어: 佐渡金山 사도 킨잔[*])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사도가섬에 위치한 금광이다. 광석은 주로 '은흑'(銀黑)이라고 불리는 석영 중에 맥상에 존재하던 휘은광 및 자연 자연금의 미립자였다.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기간 동안 중요한 재원으로써 개발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톤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 그 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취은은 막부에 상납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은은 특히 생실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취은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광산이 고갈되고, 금의 가치와 노동자 임금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수지가 맞지 않아 채굴이 중지되어, 금광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갱도의 총 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 중 관광 노선으로 개발된 구간은 300m 정도이다. 이 밖에, 매년 7월 25일 ~ 7월 27일 사이에 금광 축제가 열린다.
한때 금광으로 이름 높은 지역이었으며 사실상 일본 최대의 금광이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금고 역할도 했다. 그래서인지 오컬트 매니아들에겐 성지처럼 통한다. 비유하자면 일본판 황해도 옹진군. 이후 군함도처럼 미츠비시그룹에 매각되어 미츠비시 그룹 소유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쟁물자를 확보하는 시설이었고 여기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였는데 최소 1141명의 조선인들이 노역했다는 일본 정부의 문서가 공개된 바 있다. 노역을 시켰던 기업은 전후 조선인 1141명의 미지급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1949년 일본 정부에 해당 금액을 공탁했으나, 10년 뒤 1959년 정작 일본 정부가 시효가 지났다며 이를 국고로 환수했다는 내용의 문서다.
세계유산 등재
일본 정부는 2018년 조선인이 징용된 사도 금광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 후보로 선발하려다가 보류했지만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계속 추진하였으며 결국 2021년 12월 28일 일본 문화심의회가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했다. 2020년 6월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조선인 강제노역에 대한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아 유네스코의 경고까지 받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크게 반발했다.
등재 추진측에서는 '에도시대까지가 대상이며 태평양 전쟁 기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애초에 이전에 유네스코 권고가 나왔던 하시마 섬을 비롯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도 형성 시기로 따지면 전쟁 기간에서 수십년이나 전이였긴 해도 이전의 군함도 강제징용 관련 권고 이행 미비가 문제되는 것만 봐도 사도 금광의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결국 2022년 1월 28일,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천을 결정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위안부 문서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막기 위해 '타 회원국이 반대하면 해결될 때까지 심사를 무기한 중단' 시키는 제도를 강력히 요구해 도입시킨 바 있는데, 이를 한국과 중국이 사용할 경우 일본은 사도 광산 등재에 난관을 겪을 것이다. 그 외에도 유네스코에서 지난 21년 7월, 추천서 제출 전에 관계국과의 대화를 촉구하는 지침이 채택되었기에, 일본 내에서도 가능성이 없다며 추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강행되었다고 한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역할이 있었으며 참의원 선거 앞두고 지지층 결집 분석이 나왔다. 특히, 추천한다고 발표하기 전에 한일 갈등을 우려하는 미국에 일본 정부가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고 보도됐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폐기 사례와 같이 미국의 찬성을 이끌어내 타국 반대를 무마하여 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는 시도로 풀이되기도 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도 일본의 시도에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 지도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인류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상대로 지속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현재 유네스코 위원국 21개국 중 하나여서 러시아만 반대해도 만장일치 통과가 무산되고 러시아가 다른 위원국들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면 2/3 찬성이 어려워진다. 군함도 등재때와 상황이 달라진걸로 보인다. .
추천서에 에도 시대로 축소해 버리고 사도 금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어떻게든 흔적을 없애려는 문서가 담겼다.
2022년 7월 28일 유네스코가 사도광산 추천서의 미비점을 지적하며 추천서를 기한까지 자문기관에 보내지 않았으며 2023년 등록 심사를 위한 절차를 시작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결국, 정치권 내에서 질타가 쏟아진 것이다.
사도 광산과 관련해 5명의 추가 증언이 나왔다.
2022년 9월 29일 다시 잠정추천서를 냈고 2023년 1월 19일 재추천서를 냈다. 2023년 8월에 현지 조사를 했다.
2024년 1월 4일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2024년 이시카와현 노토 지방 지진으로 일부 파괴돼 해당 구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럼에도 추진 측은 등재에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선 한일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완전히 반대하진 않는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는데 이에 대해 외교부가 반박하기도 했다.
2024년 6월, 에도시대 부분만 등재하려는 시도에 대해 유네스코는 전체 역사를 반영하고 타국과 협의하라며 보류 판결을 해 차질이 예상된다.※ 사도광산 내 근대유산 빼고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이미 니가타현에서 조선인 강제 동원을 인정했다는 문서가 나왔다. 사도 광산이 17세기 최대 금광이라는 근거가 빈약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2024년 7월 27일 유네스코는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가 등재에 동의를 해준 것이 논란이 됐다. 그동안 등재에 반대해왔던 한국 정부는 일본 측과의 막판 협상 끝에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를 수용하고 조선인 강제 노역과 관련한 전시물도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여 한국이 등재에 동의를 함에 따라 컨센서스 방식으로 세계유산 등재가 이뤄졌다. 세계유산 등재는 관례상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의 전원 동의 방식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현안이 걸린 한국 정부의 찬성이 사도광산 등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이 비록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지만 "강제동원"이란 표현을 명확히 언급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 기시다 후미오 총리나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은 입장문을 통해 유네스코 등재를 기뻐하면서도 내용 중 조선인 강제노역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 정부가 약속을 얼마나 성의 있게 이행해 나갈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인데, 실제 일본은 2015년 군함도 하시마 탄광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한국에게 동일한 취지의 약속을 했고 이에 당시 박근혜 정부가 찬성을 표하여 등재에 성공했지만 이후 조선인 강제노동 기록을 현장에 남기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제성" 표현 문제에 대해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 이미 정리됐다. 표현 문제를 놓고 (이번에) 일본과 협의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선 한일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져 파문이 일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사도광산 등재를 두고 한·일 양국 정부가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와 관련해 현지 전시시설에서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당시의 생활상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전에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에 이미 정리되어 이번에는 일본과 협의하지 않았다"는 한국 외교부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요미우리 신문은 "2025년 국교 정상화 60년을 앞두고 관계 개선이 진행되고 있어, 양 정부 관계자에게는 새로운 불씨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일본 정부 관계자는 산케이 신문에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정부의 기존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노 다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본이 이미 강제 노역과 고된 작업 조건 등을 설명한 전시 자료와 시설을 현장에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가혹한 노동에 대해서도 '모든 노동자'로 표현하는 등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이 함께 고통을 받았다는 식으로 뭉뚱그렸다.
반응
한국
윤석열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동의에 대해 야당들은 "역사를 팔아넘긴 윤석열 정부의 외교 참사"라며 비판했다.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부정하는데도 윤석열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했다"며 "역사를 망각한 정부"라고 비판했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한일 역사전쟁의 연패"라며 "친일 본색의 윤석열 정권은 취임과 동시에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을 내비쳤다"며 "도대체 누구를 대표하는 정권이고 누구를 대표하는 외교부인가"라고 비판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전시 공간 설치라는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한 발 나아갔다고 평가하면서도, 2015년 군함도 등재 때와 마찬가지로 '강제 동원'이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은 데 대해선 아쉬움을 나타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역사의 진실을 일본 정부에 양보한 외교 실패"라고 비판했다. 이미 광산 주변에 조선인 노동자 전시물을 설치했다는 일본 설명에 대해선 "전시에서도 ‘강제 동원’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으며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됐다"고 지적했다.
반면 국민의힘 외교통일위원회 위원들은 "대승적인 한일관계 개선 노력이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SNS에 "전통 수공업의 수준을 높여 구미의 기계화에 견줄 만한 일본의 독자적 기술의 정수였던 사도광산"이라며 "등재까지 14년이 걸렸다"고 강조했다.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은 성명을 내고 "세계유산위원회 전 위원국 합의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분이 사도를 찾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널리 세계에 알려지고 평가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일본 언론은 달라진 한일 관계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 신문은 "(강제동원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피하면서도 어려운 노동 환경에 있던 기록을 자세히 전시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았다"며 "최근 전례가 없던 좋은 관계도 합의를 뒷받침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총리 주변에서는 '한일 관계의 신시대다'라며 흥분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사도광산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1991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었다"며 "시와 관광업계의 기대가 크다"고 전했다. 반면 산케이 신문은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 전시는 불필요하다'는 사설을 실으며 양국 정부의 합의 내용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