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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작품'에 해당되는 글 1

  1. 2023.10.15 박서보화백 별세 박서보프로필1
2023. 10. 15. 10:46 카테고리 없음

이름 박서보

본명 박재홍 (朴在弘)

출생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군

사망 2023년 10월 14일 (향년 91세)

학력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 / 학사)

주요 연혁


1931: 경상북도 예천 출생
1950: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
1952: 홍익대학 전시학교 미술과 서양화 전공으로 변경
1955: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 졸업
1962-199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1970-1977: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1972: 제10주년 문화예술인대회 대통령표창 수여
1977-1980: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1979: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대통령상 수여
1984: 교육헌장선포 16돌 기념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1985-1986: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장
1986-199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1987: (사)한국소년지도자협회 창립 65주년 기념 육영공로상 수여
1987: 제1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 대상 미술부문 수여
1994: 옥관문화훈장(4등급) 수훈,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설립
1995: 제4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미술부문 수여
1999: 제1회 한국미술협회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창작부문) 수여
2000: 홍익대학교 명예미술학박사 수여
2008: 대한민국 미술인의 상 수여
2011: 은관문화훈장(2등급) 수훈
2015: 워싱턴 D.C 허쉬혼 뮤지움(Hirshhorn Museum) 40주년 기념 시각미술상 수여
2018: 홍콩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아시아 아츠 게임즈 체인저상(Asia Arts Game Changer Awards) 수여
2019: 제64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 수여
2020: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공헌예술가 예술공헌상 수여
2021: 금관문화훈장(1등급) 수훈

작품


1957 회화(繪畵) No.1
1962 미술작품Primordials No.1-62
1973 미술작품Ecriture No.55-73
1978 미술작품Ecriture No.3-78
1987 미술작품Ecriture No.870907
2000 미술작품Ecriture No.000321
2007 미술작품Ecriture No.071208
2009 미술작품Ecriture No.090530
2016 미술작품Ecriture No.161207
2019 미술작품Ecriture No.190227

대한민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인 <회화(繪畵) No.1>(1957)을 그린 화가이다..

2023년 10월 14일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박서보(朴栖甫, 본명: 박재홍, 본명 한자: 朴在弘, 1931년 11월 15일~2023년 10월 14일)는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다.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 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고, 부친이 대서소 일을 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컸다.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홍익대학교는 1949년 용산구 원효로의 흥국사라는 절 부근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동양화 전공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李象範, 1897~1972)과 고암 이응노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에 부친이 갑작스레 병사했으며, 박서보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피난민 행렬을 따라 홀로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 박서보가 부산으로 내려간 홍익대학 전시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동양화 교수들이 전쟁 중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를 나와 홍익대학으로 온 김환기(金煥基, 1913-1974) 교수와 이종우(李鍾禹, 1899~1981) 교수가 서양화 교수로 있어 박서보는 전공을 바꿔 1952년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환도 후 홍익대학 미술과는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YMCA 사이에 있던 장안빌딩 뒤 창고 건물로 옮겨왔다.


1954년 마지막 학기에는 학교 동기들과 함께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지만, 모집 당시의 약속을 번복하고 육군이 졸업식장에서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끌고가자 동기 이원용(李元鎔, 1930~, 예명 수헌)과 함께 본인들의 졸업식에 불참하고, 친구 맹인재(孟仁在, 1930~)가 둘을 위해 지어준 호 수헌(樹軒)과 서보(栖甫)를 하나씩 나눠 가진 뒤 1955년부터 본명을 버리고 둘 다 새 이름으로 생활했다.1961년 박서보와 같은 처지의 보병학교 수료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걸어 전원 제대 통지를 받게 된 뒤에나 도망자의 삶이 끝났다.

박서보는 1956년 홍대에서 만난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란 이름의 화실을 운영했고, 이곳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그가 그룹전을 함께 한 현대미술가협회(속칭 현대전) 동료들의 아지트로 활용되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현재의 아내를 만나 1958년 12월에 결혼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시작해 1997년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박서보는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80년대에는 안성군 공도면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만 매진 했으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으로 있을 때 학생운동과 교내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학교 일에 붙들려 더 이상 안성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못했다. 서울에서만 작업하고 있는 중에 돌보지 못한 안성 작업실에는 여러 차례 도둑이 들었고, 1996년 몰래 침입한 동네 청년들에 의해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에 소장했던 많은 작품이 전소되었다. 초기 묘법 작품들의 많은 수가 거기서 사라졌다. 1997년 마포구 성산동에 새로 지은 작업실에 1994년에 설립한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옮겼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1994년 12월 64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2009년 11월 79세의 나이로 뇌경색으로 다시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업을 이어가서 2015년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맛보게 되면서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2019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89세의 나이로 생애 두 번째 회고전을 열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후진양성을 위해 기지재단을 설립하였다. 기지재단은 2023년 3월에 재단 명칭을 박서보재단으로 변경하였다.

작품활동

초창기


박서보가 화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당시 미술계 유일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속칭 국전)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반목과 편가르기, 기득권 챙기기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홍대를 졸업하기 전인 1954년에 박서보는 이미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졸업 직후인 1955년에도 제4회 국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하지만 터무니 없게 전쟁을 겪은 젊은 박서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1956년 반(反)국전을 선언하며 홍대 동문인 문우식(文友植, 1932~2010), 김충선(金忠善, 1925~1994), 김영환(金永煥, 1927~2011)과 함께 동방문화회관에서 독립전을 열었다. 일년 뒤인 1957년에는 김창열(金昌烈, 1929~), 하인두(河麟斗, 1930~1989), 장성순(張成旬, 1928~), 김서봉(金瑞鳳, 1930~2005), 김청관(金靑鱹, ?~?), 라병재(羅炳宰, ?~?), 조동훈(趙東薰, ?~?), 이철_(화가)/이철(李哲, 1931~) 등이 만든 현대미술가협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후 현대전이라고 불린 그들만의 그룹전을 2회부터 6회(1960년)까지 5회만 불참하고 연달아 참여하게 된다.

1958년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제3회 현대전은 한국에 앵포르멜 미술이 시작된 기점으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박서보의 <회화 No.1>의 출품 때문이다. 같은 해 열린 제4회 현대전에서는 이른바 비정형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된다. 박서보와 현대전의 동료들은 "스스로 첨단을 걸으며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는 젊은 세대의 전위적 활동"에 매진하게 되고, 이후 몇년 간 그들의 앵포르멜적 행보가 지속된다. 박서보와 현대전 동료들의 초창기 작품들은 전후 사회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보존되지 못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박서보의 초창기 작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는 <양지(陽地, Sunny Spot)>(1955년), <여인좌상>(1955), <닭>(1956), <회화 1-57>(1957), <No.18-59>(1959) 정도가 있다.

원형질 시기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Art)의 프랑스위원회에서 파리에서 개최할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을 대표할 만 30세 이하 젊은 작가를 보내달라는 통보가 왔다. 대표작가로 프랑스에 가게 된 박서보는 회의가 연기되었다는 통지를 받지 못해 원래 한 달이었던 일정을 11개월로 늘려 파리에서 버텨야 했다. 이후 박서보는 작업에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 시기의 작업이 뿌리기와 흘러내리기에 주목하였다면, 파리에서 귀국 후 제작한 원형질이라고 부른 연작에서는 일상에서 나온 오브제를 태워 "화면 위에 형태를 쌓아 올린 후, 다시 팔레트 나이프로 깍거나 쓸어내리는 방법, 혹은 표면에 마대를 붙인 후 분출구 같은 구멍을 부분적으로 만들어 마티에르를 주는 방식"을 주로 썼다. 박서보 자신이 이 시기의 작품들에 대해 “대량학살, 집단 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산물”이라고 말했다. 원형질 연작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작되었다.

유전질 시기


1960년대 후반 제작된 유전질 작업은 원형질 시리즈와는 인식론적으로나 감각적 측면에서 상반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보이며 전통적인 오방색을 활용한다. 이 시기에 작가는 처음으로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이어 유전질 시리즈 내에서도 다시 변화를 보이는데, 기하학적 추상을 벗어나 인체라는 구상성을 확연히 드러내기 시작하고 에어 스프레이 기법을 활용하여 매끈한 질감의 팝아트적인 색채를 구사한다. 서구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전질 연작은 1970년 개인전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고, 미술평론가들은 “옵아트적인 밝고 강한 각종 원색과 기술적으로 수련된 선”,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허상의 이미지” 혹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잡은 현실의 일각” 등의 말로 평론했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 중 실제 인체에 입힌 옷을 화학약품으로 굳혀 사람 없이 빈 껍데기만 입체로 제시해서 설치 작품인 허상 작품은 조지 시걸에게서 영향 받은 일상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업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한국관을 설계하고 그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를 기획한 건축가 김수근의 요청을 받아 '허의 공간/유전인자와 공간'이란 이름으로 수십 개의 작품이 하늘을 향해 뛰는 모습으로 구현되었고, 일부는 모래와 함께 관을 설치해 묻기도 했다. 그것이 반정부적으로 읽혀 전시 중간에 박서보의 입체 작품들은 전부 철수 당한다. 허상을 포함한 유전질 시기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이다.

초기묘법 시기


박서보는 유전질 시기 중에 둘째 아들의 국어 공책 낙서에서 착안한 반복적인 연필긋기를 하고 있었다. 1967년의 첫 작품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른 후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 긋기로 채우는 식이었다. 이후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좀 더 자유롭게 선긋기를 진행했고, 화면에는 선과 연필의 필압에 의해 밀려나간 안료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화면에는 작가의 신체호흡과 리듬감을 반영한 리드미컬하며 유연한 선이 뒤덮히게 되었다. 올오버 페인팅이 탄생했다. 이후 화면은 그리고 다시 덧바르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화면 위의 선은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며 화면 속으로 수용되었다. 이 연필긋기 작품들은 1969년 일본에서 만난 이후 긴밀하게 교류해온 재일작가 이우환의 제안으로 일본 도쿄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선 보였다. 박서보는 이 시리즈에 묘법이라는 제명을 붙였고,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제안을 받아 외국어 제목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0도의 글쓰기>에서 영감 받은 프랑스 단어 Ecriture를 채택했다. 이 초기 묘법 시리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진다.

후기묘법 시기


후기 묘법은 1982년 박서보가 매체로서의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서양 종이와 달리 안료를 흡수하여 일체화해 내는 한지 혹은 닥지의 특성은 자연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한지가 갖는 빛과 소리를 투과하는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이자 자연으로 이해되며 상징화되었다. 작업은 초기 묘법과 동일하게 연필로 선을 긋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한지가 갖는 침투성과 흡수성으로 인해 안료는 한지 속으로 스며들고, 작가는 여기에 반복적 행위를 매개로 화면에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성이 일체화되어 화면 위 마티에르로 드러난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를 일명 '지그재그' 시기라고 부르고, 1994년부터 2004년까지를 소위 '블랙 앤 화이트' 시기라고 부른다. 블랙이 화이트 계통의 작품보다 먼저 등장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기와 겹치게 2000년부터 작품에 레드가 등장하고, 이후 2018년까지 다양한 색상이 작업에 쓰였다. 한지를 이용한 묘법으로 넘어와 다양한 색상을 찾아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박서보는 "그림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2015년부터 이전과 다르게 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말하는 미술시장의 관심사에 포함되었다.

미술운동


박서보는 1971년부터 한국미술협회의 국제담당 부이사장직을 맡아 자신을 비롯한 모노크롬 작가들의 여러 기획전과 해외교류전, 국제전, 개인전 등을 기획하고 국내ᆞ외에 알리는 예술행정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현대미술의 혁신이 몇몇 전위 작가들만의 각성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정착시킬 제도적 발판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앙데팡당>(1972), <현대미술제>(1975), <에콜 드 서울>(1975)의 3대 전시체제를 창설했다. 각각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역으로 확산하며, 우수한 예술적 성과를 집약하여 전시하는 대단위 연례 전시기구였다.<ref.>박서보, "현대미술과 나 II", <미술세계> 1989년 11월호, 106-108쪽.</ref> 1970년대 후반 미술운동가이자 대학교수, 화가로서 일인삼역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분주한 그의 모습을 보고 한 기자는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 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고 소개했다.

2022년 광주비엔날레에 박서보의 이름을 딴 예술상이 제정되었다가 "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위상’과 오월정신,광주정신을 매판 하는 행위"라는 지역예술계의 비판을 받고 1회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지역예술계에서는 "1960~70년대에 지금은 박제된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의 상징적 대표로서, 1960년 4·19 혁명에 문화권력의 기회를 엿보고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한 군부독재정권에 순응하며 기록화 사업에 활발히 가담했으며,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만든 유신정권 시절 관변미술계의 수장으로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라 외면하고 개인의 출세와 권력 지향과 영달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사망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폐암 3기 판정 소식을 전했다. 당시 고인은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작가는 최근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 왔으며 지난 9월 열린 프리즈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posted by boy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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